수업, 철학과 만나다
수업, 배움을 넘어 삶으로
총장 이혁규 (청주교육대학교)
1. 들어가며
철학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의미에 담아내기에는 철학이라는 용어가 내포하는 바가 너무나도 광범위하고 다양하다. <수업, 철학과 만나다>라는 주제도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수업이 무엇이며, 철학은 무엇인지에 대한 주관적 해석에 기반하고 있다.
우선 나는 수업이 인류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 출현한 독특한 활동 양식이라는 관점을 택한다. 독일의 교육학자 쉰켈은 “수업은 역사적 현상이지 인간학적 현상이 아니다”1)라고 언명하였다.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 배움이 부수적으로 동반되어 일어나는 비형식적 교육과 다르게 수업은 배움을 주된 목적으로 발명된 인간 활동 양식이다.
그것은 역사 발전의 특정 시점에서 등장하였고, 시대상을 반영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오늘에 이루고 있다. 따라서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지를 묻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고 변하지 않는 본질을 탐구했던 서양 철학의 전통과도 깊은 관련을 맺는다. 한편, 교사의 수업 행위는 이론을 발견하기 위해서 사물을 관조하거나 물건을 생산하기 위한 노작 활동과 달리 그 자체가 고유한 목적을 지닌 의식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이며, 그 활동의 성격에 맞는 전문성 신장의 방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생각에 바탕을 두고 ‘변하지 않는 수업의 본질’, ‘변화하는 수업의 맥락’, ‘교사의 수업 전문성’이라는 주제를 압축적으로 다루어보고자 한다.
1) Sünkel, W.(1996). Phänomenlogie des unterrichts: Grundriss der theoretischen Didaktik. Juventa-Verlag.
권민철 옮김(2005). 수업현상학. 학지사. 47쪽.
2. 변하지 않는 수업의 본질
사물에 본질이 있다는 생각 자체가 오늘날의 많은 철학자의 공격을 받고 있다. 그러나 본질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대상을 이해하는 한 가지 유용한 접근법이다. 내가 보기에 수업의 본질을 가장 자명하게 드러낸 학자는 독일의 쉰켈이다. 그는 ‘교수적 삼각형(그림1)’을 통해서 수업의 본질을 표현하였다. 현실의 다양한 수업은 이 근본구조의 변종이다. 교사, 학생, 대상은 수업을 구성하는 세 가지 핵심 요소이다. 이 중 하나만 빠져도 수업이 구성되지 않는다. 쉰켈은 이것을 “이 셋은 동일한 수업적 존엄성을 갖는다”라는 말로 멋있게 표현하였다.2)
‘교사’와 ‘학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하다. 반면에 ‘수업대상(G)’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쉰켈은 ‘오직 성인에 의해서 수행되는 모든 일반적 사회적 활동에 비해 그 수행의 복잡성의 정도가 심하여 그저 따라하기만 해서는 충분히 빠르면서도 제대로 배울 수 없는 객관적인 (작업, 행위, 반성) 활동’만이 수업의 대상이 된다고 하였다.3)
즉, 인간의 모든 활동이 수업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좀 쉽게 풀어보자면 학습자가 혼자서는 배울 수 없는 가치 있는 사회적 활동만이 수업의 대상이 된다. 이 때문에 수업은 본질적으로 교사를 필요로 한다.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교사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내용은 수업의 대상으로서 별로 적합하지 않다. 교사는 수업에서 학생이 대상을 이해하고 습득할 수 있도록 최선의 조언을 해야 한다. 교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학생이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면 수업이 성립하지 않는다.
교수적 삼각형은 교사에게 필요한 전문성이 무엇인가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흔히, 내용을 잘 알면 잘 가르칠 수 있다는 통념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교사는 학생을 잘 알아야 한다. 나아가서 학생이 대상을 습득하는 과정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 학생이 대상을 습득하는 것을 교사가 조력하는 것을 나타낸 그림 속 화살표는 수업의 본질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화살표이다.
2) Sünkel, W.(1996). 앞의 책. 96쪽.
3) Sünkel, W.(1996). 앞의 책. 101-103쪽.
<그림1> 교수적 삼각형
3. 학교, 변화하는 수업의 맥락
위에서 설명한 교수적 삼각형은 수업의 근본구조를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수업은 매우 다양하다. 교사, 학생, 대상의 차이에 따라서 수업은 매우 다양한 양태로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수업의 모습은 근대 공교육 제도의 탄생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보편 교육을 통해 국민을 형성하려고 했던 근대 국민국가의 요구와 산업혁명 이후 등장한 새로운 생산 양식에 따른 노동자 교육의 필요성은 근대적 학교가 탄생한 배경이다. 이때 정립된 수업의 양태를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국가가 정한 표준적인 교과 내용을 일정한 자격을 갖춘 표준적인 교사가 동일 연령대로 표상되는 표준적인 학생에게 전수하는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지식관, 인식론, 학습관도 존재하였다. 고정불변으로 생각하는 진리로서의 지식이 존재하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수업의 주된 목적이며 그것을 전수하는 표준적인 방법이 있다고 믿었다.
당시 학생들에게 전수되는 지식의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학생들이 졸업해서 얻게 될 직업에서 요구하는 지식이나 기능이 높은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등 단계 이후에서는 기본 기능을 중심으로 다수를 교육하는 대중 교육과 고급 사고력을 기르는 일부 엘리트를 위한 교육으로 분화되었다. 당연히 다수 학생을 가르치는 공교육 교사들에게 요구되는 전문적 역량도 높지 않았다. 교사들의 역할은 다른 전문가가 정해준 교과 내용을 효율적인 방법으로 전달하는 기능인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학교가 처한 사회적 맥락은 어마어마하게 달라졌다. 근대 국민국가와 산업혁명이라는 공교육을 탄생시킨 거시적 맥락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국가 단위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전지구적 이슈들이 분출하고 있다. 오늘날의 학습자들은 지역과 국가를 넘어 세계적 차원의 문제들을 이해하고 그 해결을 위해 함께 협력할 수 있는 지구적 역량을 길러야 한다. 한편, 4차 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기술 진보로 인해서 단순 반복적인 일은 물론 상당한 높은 수준의 사고를 필요로 하는 직업까지 인공지능이 빠르게 대체해 가고 있다. 따라서 지금의 공교육 기관에서 제공하는 수준의 문해력과 기능만 가지고 학교를 졸업하는 사람들은 장래 직장을 얻지 못하고 생존의 위기에 내몰릴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 변화는 표준적인 지식을 교사가 표준적인 학생에게 일정 기간 가르치면 남은 생애 전체를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학교 교육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을 해체하고 있다. 습득해야 할 고정불변의 지식이 존재한다는 관점도 희미해지고 있다. 정보와 지식은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고 있을 뿐 아니라 놀라운 속도로 폐기되고 갱신되고 있다. 따라서 고정된 지식을 습득하고 계속 유지하는 것이 별 쓸모가 없어져 가고 있다. 한번 배운 지식을 일관되게 견지하는 것은 오히려 새로운 학습에 방해가 된다. 일관성보다는 유연성, 확신보다는 의심, 그리고 자기가 알고 있던 것을 잊어버릴 수 있는 인지적 기술 등이 평생 학습 시대에 더 요구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소수 엘리트뿐 아니라 모든 학습자에게 필요한 능력이다. 따라서 21세기 학교는 모든 학생들이 수업에서 깊은 사고와 심층 학습을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 이는 교사의 수업 전문성과 관련하여서도 새로운 도전이 되고 있다.
4. 교사의 수업 전문성, 다시 생각하기
수업의 본질적인 구조와 변화하는 수업의 맥락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교사의 수업 전문성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교수적 삼각형은 우리는 아무리 내용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학습자의 눈높이로 내려가서 그 발달(성장) 과정을 이해하고 성장을 촉진하는 능력이 없으면 잘 가르칠 수가 없음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교사는 학생이 학습 사태에서 보이는 반응을 잘 이해하고 적절한 피드백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수업의 근본구조가 요청하는 바이다. 한편, 폭주하는 지식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식 생태계라는 맥락을 고려할 때 오늘날의 교사는 스스로 잘 배우는 존재여야 한다. 내용을 배우는 것보다 오히려 배움에 대한 호기심을 잊지 않고 평생 학습을 지속할 수 있는 삶의 습속을 익히는 것이 더 중요해진 오늘날 교사는 이 점에서 학습자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21세기 교사의 존재론적 본질은 가르침의 탁월성이 아니라 배움의 진정성과 지속성에 있다. 교사가 능동적인 학습자로서 새로운 배움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모습을 보인다면 학생들은 그런 교사의 존재를 모방하면서 학습의 닻을 올리고 평생 미지의 세계를 두려움 없이 항해할 힘을 배울 것이다.
한편, 수업 연구자로서 나는 꽤 오래전부터 “더불어 성장하는 성찰적 실천가”를 바람직한 교사상으로 상정하고 있다. ‘성찰적 실천가’라는 개념은 교육학자 쉔Schön, D.A.이 1983년에 『The reflective practitioner』라는 책을 출간하고 나서 교육계에 보편적으로 자리 잡은 개념이다. 여기에 더하여 나는 교사 학습공동체의 중요성을 좀 더 강조하였다. 교사 전문성과 교사상에 대한 이러한 개념의 등장은 가르치는 활동의 성격에 대한 철학적 반성에 기반하고 있다.
한동안 주류 교육학은 자연과학적 연구 방법의 원리를 응용하여 교사의 바람직한 수업 행동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하였다. 예컨대, 여러 다른 변인을 통제한 가운데 교사의 특정한 행동이 학생의 학업 성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서 소위 교사의 효과적인 수업 행동의 목록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목록은 개별 교실의 맥락을 넘어서 모든 교실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원리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방법은 이론과 실제의 괴리를 낳았으며,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하는 연구자와 실천가로서의 교사를 분리하여 전자를 후자보다 우위에 위치시켰다. 이러한 연구 방법은 교실 수업의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쉔을 비롯한 일군의 학자들은 이런 전통적인 접근법이 교사의 수업 활동의 성격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교사가 수업을 잘 수행하는데 필요한 지식은 일반적이고 이론적이기보다는 맥락적이고 실제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phronesis, practical knowledge)’에 가까운 개념이다. 교사는 추상적인 이론을 탈맥락적으로 교실에 적용 하기보다는 순간순간 변화하는 교실 수업의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훌륭하고 적절한 판단을 내리면서 실행에 옮기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을 신장시키기 위해서 계획-실행-성찰의 일련의 과정을 숙고하면서 진행해가는 실행 연구(action rese arch)가 대안적 연구 방법으로 정립되었다. 한편, 오늘날 전문적 실천가들이 생산하는 실천적 지식 혹은 지혜는 개별 실천가들의 고립된 실천의 산물이 아니라 동료 실천가들 간에 끊임없이 소통되고 공유되는 공동체적 지식의 성격을 지닌다. 수업 실천에 대한 이러한 일련의 철학적 통찰을 기반으로 나는 교사의 수업 능력을 수업 설계 능력, 수업 실행 능력, 수업 성찰 능력, 수업 소통 능력으로 범주화하였다. 수업 설계 능력은 말 그대로 수업을 잘 설계할 수 있는 역량이다. 수업 실행 능력은 계획한 수업을 실제로 잘 행할 수 있는 역량이다. 수업 성찰 능력은 수업 실천을 깊이 되돌아보고 개선해 갈 수 있는 역량이다. 수업 소통 능력은 동료들과 함께 수업 경험을 나누고 더불어 성장할 수 있는 역량이다. 이 네 가지 범주 모두가 균형 있게 성장해야 수업 전문성이 총체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2> 성찰적 실천가의 네 가지 수업 능력
5. 나가며
어떤 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1만 시간이 필요하다는 원리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저 1만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전문가가 될 수 없다. 자신의 실천을 끊임없이 숙고하고 성찰하는 노력이 없이는 전문가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개인의 고립된 노력이 아니라 동료 전문가와 함께하는 공동체적 실천이어야 한다. 실제로 교사가 그런 수업 전문성을 신장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간단하게 점검하는 방법으로 나는 종종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한 학기에 적어도 한 번 이상 자신의 수업을 녹음하거나 녹화하여 다시 분석하는가? 둘째, 한 학기에 적어도 한 번 이상 자발적으로 동료 교사를 교실에 초청해서 자신의 수업을 관찰하고 조언해달라고 요청하는가? 셋째, 한 학기에 적어도 한 번 이상 자신의 수업에 대해서 학생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설문 조사를 하거나 면담을 하는가?
이상 세 가지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한다면 수업 전문성을 쌓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 부족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해서 “모두 그렇다”라고 답하는 교사 집단을 만난 적이 별로 많지 않다.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자신의 수업 전문성이 시간이 가면서 자연스럽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순진한 낭만주의이다. 한국 교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잠재적 역량을 지닌 우수한 집단이다. 그러나 기본에 충실한 학습 공동체 문화의 형성 없이는 그런 잠재력은 발아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자신과 동료들의 수업을 개선하고자 하는 순전한 열망을 바탕으로 기본에 충실함으로써 가까운 장래에 한국의 수업 실천이 세계적인 모범 사례가 되는 날이 오기를 꿈꾼다. 내가 작년에 쓴 책의 부제를 「우리 교사와 학생들이 세계의 BTS(Best Teacher and Student)가 되기를 꿈꾸며」라고 지은 데는 그런 소망이 담겨 있다. 한류가 문화로 세계를 흔들고 있듯이 우리 교육이 세계의 좌표가 될 수 있는 날이 꼭 올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참고 문헌
이혁규(2021). 한국의 교사와 교사되기. 교육공동체 벗. Sünkel, W.(1996). Phänomenlogie des unterrichts: Grund riss der theoretischen Didaktik. Juventa-Verlag. 권민철 옮김(2005). 수업현상학. 학지사.
Fred A. J. Korthagen 공저/조덕주 외 역(2007). 반성적 교사교육 실제와 이론. 학지사.
Schön, D.A.(1983). The reflective practitioner. New York: Basics 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