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하는 인간,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는 과학
– 과학은 왜 배우는가? –
경인교육대학교 과학교육과 교수 이규호
“과학은 왜 배우는가?”
학기가 시작하면 항상 학생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혹자는 정말 과학을 배우는 이유가 궁금해서 이러한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또 혹자는 곧이 힘들게 과학을 왜 배워야 하는가 하는 회의감에서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는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하는가? 혹자는 막연하게 과학을 왜 배워야 하는가에 대해 현대 사회가 매우 발전된 과학 기술의 시대이므로 과학은 필수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 현대 사회는 과학·기술을 빼고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학을 모른다고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여러분들은 모두 스마트 기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특히 스마트폰의 경우는 항상 휴대하고 다닌다. 그런데 스마트폰의 작동 원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어떻게 화면을 터치하면 앱이 작동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어린아이부터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까지 어렵지 않게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다. 또, 스마트폰을 작동시키기 위한 배터리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해서 충전의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왜 스마트폰은 리튬 전지를 쓰는 것일까? 왜 리튬은 귀한 것일까? 왜 리튬을 이용한 전지는 가끔씩 폭발을 하는 것일까? 등등 한 발자국만 더 깊게 들어가면 그에 대한 답은 과학에서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모른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일까? 복잡한 현대 과학·기술의 시대에 그 원리를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 결과물을 누리지 못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꼭 과학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는 다소 무리가 따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림 1] 스마트폰(출처: 매일경제)>
<[그림 2] 폭발한 리튬 배터리(출처: 동아사이언스)>
어떤 사람들은 과학을 잘 알면 일상생활 속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 과학을 잘 알고 있다면 일상생활 속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자. 여러분들은 혹시 자전거를 탈 수 있는가? 자전거는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가면 넘어지지 않을 수 있지만 가만히 멈춰 있으면 넘어진다. 물론 균형 잡기를 아주 잘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을 수 있지만 보통의 경우는 넘어지게 된다. 자, 이제 페달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 보자.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왼쪽으로 기울어지게 되면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핸들을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가? 왼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자전거의 핸들을 왼쪽으로 돌리면 앞바퀴가 넘어지지 않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게 된다. 이러한 운동의 이유는 돌고 있는 팽이의 축이 약간 기울어질 때 팽이의 축이 회전하면서 돌게 되는 세차 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지구도 이러한 세차 운동을 하기 때문에 지구의 자전축이 향하는 방향의 별이 시간에 따라 변하게 되고 약 14,000년 후에는 자전축 근처에 현재의 작은곰자리의 α별이 아니라 거문고자리의 α별인 베가가 위치하게 된다. 즉, 세차 운동의 원리를 알면 지구의 자전축의 회전도 이해할 수 있고, 팽이의 운동도 이해할 수 있고 또 나아가 자전거를 탈 때, 핸들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도 알 수 있게 된다. 사실 앞의 두 세차 운동은 평소에 관심이 없는 것일 것이고 그나마 내 생활과 관계가 좀 있는 세 번째 운동의 경우는 여러분들이 굳이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몸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경험을 토대로 핸들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게 되어서 도는 것이지 세차 운동의 원리를 알고서 하는 행동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과학을 모른다고 해서 일상생활 속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렇다면 과학은 왜 배워야 하는 것일까? 필자는 학생들에게 과감하게 말한다. 과학을 몰라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인류가 지구상에 최초로 탄생한 이래 지금까지 엄청난 과학 문화를 만들어 왔지만 아주 오랜 옛날에는 과학의 원리를 모르고도 그냥 살았다. 날이 밝으면 밖에서 활동을 하고 어두워지면 무서운 짐승들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해 동굴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물고기들을 잡아먹고 열매들을 따먹으면서 생존을 이어 나갔다. 특히 열매들은 많이 있는 지역이 자꾸 바뀌기 때문에 열매가 많은 지역을 찾아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낮과 밤이 생기는 이유도 또 계절이 변하는 이유도 모른 채 그냥 생존을 위해 환경에 적응해 나갔다. 이러한 행동들은 인간만이 하는 행동이 아니다. 인간 아닌 동물들도 다 할 수 있고 또 지금도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 할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인간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낮과 밤이 왜 생기는 것일까? 낮에는 해가 떠 있고 해가 지면 밤이 됨을 알고 난 이후에는 언제 해가 뜨고 또 언제 해가 질지 궁금해했다. 또한 지금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나면 해가 지는 것일지 그 방법을 알아나갔다. 그 과정의 출발은 ‘왜 그런 것일까?’를 생각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적응의 대상이었던 자연에 대해서 왜 그런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하고 그 의문에 나름대로의 최선의 이유를 찾아 나가려 노력하였기에 오늘날의 최첨단의 과학 사회가 만들어졌다.
<[그림 6] 일출의 모습(천문 관측 프로그램 캡쳐-2023년 9월 23일 오전 6시 30분)>
우리가 다른 동물과 가장 다른 측면은 이것이 아닐까? ‘왜 그런 것일까?’ 이러한 생각,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과학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는다면 과학을 하지 않는 것이고 과학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 아닌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인데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가? 당연히 존재한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노예라고 한다. 주인이 시키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는. 노예에게는 생각이 필요하지 않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기 때문에. 그래서 필자는 학생들에게 과감하게 주장한다. 당신은 당신의 삶에 대해 주인인가 아니면 노예인가? 노예로 살고 싶은 사람은 굳이 과학을 배울 필요가 없다. 자신의 삶에 주인으로 살고 싶다면 과학을 하라.
과학은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생각만 하면 과학을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과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일반 사람들은 다양한 의미로 과학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다음의 글은 한 신문 기사의 내용 일부분이다.
<[그림 7] [과학을 읽다]비(非)과학적인 ‘미친 전기의 나라’ 신문 기사의 일부분(출처: 아시아경제)>
이 기사에서 말하는 과학적이라는 용어를 다른 말로 대체해 보자. ‘상식의 과학’ 대신 ‘상식의 논리’라고 읽어도 내용을 읽는데 무리가 없다. 그리고 ‘비과학적 전기 요금 책정’ 대신 ‘비합리적 전기 요금 책정’으로 읽어도 역시 내용을 읽는데 무리가 없다. 이렇듯 사람들이 과학적이라는 용어를 다른 용어 대신에 사용해도 큰 위화감이 없는 이유는 과학 본성의 중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과학을 구성하는 태도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합리성, 객관성, 개방성, 정직성 등의 요소는 사람들이 과학에 대한 이미지를 갖는데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물론 오늘날의 과학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과학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이미지는 과장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과학은 과연 객관적인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과거 과학적 관찰은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수행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관찰자의 감각 기관은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므로 착시와 같은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관찰은 관찰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다른 결론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우리는 이것을 관찰의 이론 의존성이라 부른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수행하는 관찰은 완벽하게 객관적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과학은 완벽하게 객관적은 아니지만 우리는 과학에 대해 여전히 신뢰를 보내고 있다.
그 이유는 또 무엇일까? 우리는 그 이유를 과학의 탐구 수행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과학자들은 어떤 현상을 관찰한 후 그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검증 가능한 형태로 가설을 세운다. 그리고 그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탐구 계획을 설계하고 수행한다. 탐구 수행의 결과로 얻어진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결론으로 처음 제기하였던 가설을 검증해 나간다.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탐구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공통적인 부분은 출발이 기존의 이론 체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기존의 이론에 뿌리를 내린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탐구 수행에 있어서는 철저한 공개를 통해 누구나 공개된 그 방법을 통해 동일한 결괏값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하며 이 과정에서 의도적인 자료의 왜곡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탐구 수행의 모습에서 개방적이고 정직하고 합리적인 과학의 이미지가 형성된다고 하겠다. 나아가 과학의 발전 역사를 통해 생각의 출발이 된 과학 이론이 영구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진행형으로서의 진리라고 받아들임으로써 항상 판단 유보라는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고 있다.
우리는 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침으로써 새로운 과학자를 기르고자 한다. 하지만 과학교육의 목적이 그것만이라고 한다면 모든 학생들이 과학을 배워야 하는 당위성을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2022 개정 교육과정에 의하면 ‘과학은 모든 학생이 과학의 개념을 이해하고 과학적 탐구 능력과 태도를 함양하여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과학적이고 창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과학적 소양을 기르기 위한 교과’라고 그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의 지식, 탐구 방법 등이 과학자의 연구와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현재의 기준으로 합의된 과학 지식의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과학의 탐구 수행 모습을 학습할 수 있다. 과학을 배움으로써 단순히 과학 이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그리고 개방적이면서도 정직한 민주 시민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이 가지고 있는 여러 이미지들은 그 생각의 출발이 기존의 과학 이론이기 때문에 기존의 과학 이론이 당연히 중요하다. 그렇지만 과학 이론을 배우는 것만이 과학을 배우는 목적이 아님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바탕 아래에서 현재의 상황을 냉정하게 돌아보자. 과연 우리는 학생들에게 과학 이론만을 배우기를 의도하지는 않는가? 요리책이라고 비판받았던 것처럼 제시된 실험 과정에 따라 실험 수행만으로 수업이 끝나지는 않는가? 과연 각 차시에서 수업의 목표가 과학을 배움으로써 가질 수 있는 ‘왜’ 또는 ‘어떻게’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해 보도록 만들고 있는가? 근본적으로 교육과정에서는 학교에서 교사들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는가?
예를 들어 달의 위상 변화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2007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라) 여러 날 동안 해가 진 직후 같은 시각에 보이는 달 모양과 위치 변화를 알고,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였던 것이 2009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라) 여러 날 동안 관찰한 달의 모양이 달라지는 것을 달의 공전으로 설명할 수 있다.’로,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6과09-03]달의 모양과 위치가 주기적으로 바뀌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로 제시되었다. 마지막으로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4과13-01] 달의 모양과 표면, 달의 위상 변화를 관찰하여 밤하늘 관찰에 흥미를 가질 수 있다.’로 제시되었다. 앞의 3가지는 5학년, 5-6학년군의 내용인 반면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달에 대한 언급이 3-4학년군에 제시되었다는 차이는 있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 볼 때 어느 수준까지를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2007 개정에서는 달의 모양 변화, 관측 시각에 따른 달 모양과 위치 변화를 관찰하도록 하였고 관찰에 그치지 않고 이유를 설명하도록 하는 반면, 2009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위상 변화의 원인까지만 설명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달의 모양과 위치가 주기적으로 변하는 것을 관찰할 것을 요구하지 왜 그러한지 굳이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있다.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달의 위상 변화를 관찰할 것만을 요구하고 있다.
관찰은 중요한 과학 활동임은 부인할 수 없다. 또 그 관찰을 통해 과학적 이론을 굳이 배우지 않더라도 관찰 대상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게 되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하겠다. 그러나 무언가 허전함은 분명하다. 과거에는 가능한 ‘왜 그런 것일까?’를 답해 보던 것이 지금은 왜 안되는 것일까? 학생들에게 학습량을 줄여주고자 하는 배경 아래서 이루어진 일련의 내용 축소가 과연 적절한 방향을 가지고 진행되는 것인가? 자연에 대한 관찰은 필연적으로 ‘왜 그런 것일까?’라는 질문을 가져올 수 있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왜 그런 것일까를 해결해 보는 과정에서 과학이라는 교과에 흥미를 가질 수 있고 나아가 과학이라는 교과를 배움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생각하는 방법’을 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이 생략된다면 학생들은 ‘달의 모습이 변하는 것은 신기하기는 하지만 그걸 왜 우리가 굳이 배워야 하는 것이지?’, ‘달의 위상 변화를 모른다고 살아가는데 문제가 생기나?’ 하는 등의 의구심만 깊어가고 결국 관련 내용은 학교에서 달의 모양에 따른 이름을 외우라고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만 높아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친다는 행위는 단지 ‘지식을 전달한다.’의 수준을 넘어서는 활동이 필요하다.
기본적인 지식을 배우고 그 지식을 기반으로 하여 일련의 생각을 추론하여 새로운 현상에 적용해 봄으로써 과학의 효능감을 느낄 수 있다. 생각의 추론 과정에서 수행하는 실험 등의 활동에서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자료를 획득하고 획득된 자료를 처리함에 있어 정직함을 배우고, 또 그 자료를 바탕으로 결론을 이끌어 내는 과정에서는 합리성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주장과 다른 주장이 가능함을 토론을 통해 학습하면서 판단 유보의 자세를 배울 수도 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은 우리가 민주 시민의 한 일원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 소양을 갖추는 과정인 것이다. 새로운 현상에 대한 생각의 추론을 위한 출발은 ‘왜’ 혹은 ‘어떻게’와 같은 의문에서 부터이다. 일선의 교사들이 과학을 가르침에 있어 지식 자체를 가르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지식이 어떻게 의미 있게 활용되는 지를 경험하게 지도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교과 내용에서 ‘왜’, ‘어떻게’에 대한 질문들을 계속 떠올려 볼 필요가 있겠다.
지금도 현장에서 열심히 과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들에게 외람된 질문일 수 있으나 다시 한번 되돌아보았으면 좋겠다. 나는 과학 교과에서 학생들에게 지식만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가?
녹녹하지 않은 현실의 상황에서 모든 교사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어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도 지나친 요구일 수 있지만 원론적인 입장에서 감히 말씀드린 것이니만큼 부디 필자의 의견으로 인해 혹여나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맺는다.
그림 출처
[그림 1] 출처 스마트폰 사진
https://www.mk.co.kr/economy/view.php?sc=50000001&year=2018&no=758994
[그림 2] 폭발한 리튬 배터리
https://m.dongascience.com/news.php?idx=19502
[그림 3] 자전거 타기
http://www.k-health.com/news/articleView.html?idxno=29912
[그림 4] 팽이치기
https://news.seoul.go.kr/welfare/ar
chives/204926
[그림 5] 지구의 세차 운동
https://astro.kasi.re.kr/learning/pageView/5234
[그림 7] 신문 기사 발췌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4090211064504275